
우리의 장문화는 선대에서 후대로 계속 이어져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음식문화다. 한식韓食의 근간은
장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손맛이 다르듯
집집마다 장맛도 다 다르다.
나는 어머니인 윤왕순 명인으로부터 천리장을 계승해 전통 장류의
명맥을 잇고 있다. 어머니의 손맛을 지키고, 잊힌 장맛을 되살려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세상에 알리는 것이 전수자인 나의
사명이 아닐까.

천리를 가도 변치 않는 전통 간장
천리장은 파평 윤씨坡平 尹氏 가문에 대대로 전수되어
내려오는 내림장으로, 파평 윤씨 집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집안
여인의 손맛이자 별미장이다. 대중에게는 이름도 생소할 뿐만 아니라
존재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전통 간장이다.
천리장의 재료는 감청장甘淸醬과 한우韓牛로
의외로 간단하다. 감청장은 단맛을 지닌 맑은 간장으로
감장甘醬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천리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간장부터 제대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한의학의
본초학에서는 ‘소고기의 맛은 달고 따뜻하며, 뱃속을 편안하게 하고
소화기를 튼튼하게 하여 기운을 나게 한다. 그리고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 맛이 단 간장甘醬에 맛이 단
소고기韓牛를 더하니 천리장은 그 맛이 깊고 달다.
천리장은 졸인 감청장에 소고기를 가루로 만들어 넣은 후 오랫동안
뭉근하게 달여서 농도를 걸쭉하게 해 만든다. 제조 방식 덕분에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며, 만드는 사람의 정성은 더욱 많이
든다. 그래서 천리장은 “천리千里 길을 들고 가도 상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맛과 영양면에서 보면 천리장은 소고기의 달고 구수한 감칠맛으로
맛을 배가시키고, 영양가를 보충한 우수한 식품이다. 또한 농도를
걸쭉하게 함으로써 수분의 함량을 낮추어 일반 간장보다 보존성,
저장성을 높인 과학적인 음식이다.


자연의 선물만으로 장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온 손마디가 부르트도록 긴 시간 동안
애가 타도록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장입니다.
- 『대한민국식품명인 제50호 윤왕순 - 천리장』 中
귀한 간장에 귀한 소고기가 어우러진 장이라는 점만 보아도 천리장은
예로부터 아무나 맛볼 수 없었던 고급 전통 장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리장은 주로 궁중과 양반가에서만 즐기던 장이었으며, 왕실
의궤儀軌에도 기록되어 있다.
천리장 제조법 등을 소개하고 있는 현존하는 고문헌은
『산가요록山家要錄』, 『증보산림경제』 등을 비롯해
모두 6권으로, 그중에서도 『증보산림경제』에서 설명하는 제조법과
윤왕순 명인의 천리장 제조법이 거의 같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윤왕순 명인이 대한민국식품명인 제50호로 지정받은 이후, 여러
방송에서 천리장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천리장을
무단으로 복제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고문헌 속에서만
존재하던 천리장을 원형 그대로 복원시키기 위해서는 숱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나는 천리장의 전수자로서 윤왕순 명인을 도와
천리장의 진정한 맛과 가치를 후대에 올바로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장의 ‘맛’
지난겨울 국립농업박물관과 함께한 〈기다림의 맛, 시_간〉 전시는 대중에게 천리장을 선보이고 우리의 전통 식문화 안에서 장이 갖는 중요성을 알릴 수 있는 뜻깊은 자리였다. 국립농업박물관을 찾은 많은 관람객이 천리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학예사님께 전해 들었다. ‘천리장’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전시해설사의 설명을 빠짐없이 귀담아들었다고 한다. 기획전을 통해 천리장을 알리고 대중들에게 한 발 더 다가선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었다.

관람객의 후기 중에는 천리장이 어떤 맛인지 직접 먹어 보고
싶다는 의견이 무엇보다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관람객 한 명 한
명에게 천리장을 맛보여 주고 싶었지만 여건상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던 차에 ‘명인과의 대화’라는 좋은 기회가 다시
한번 찾아왔다.
명인과의 대화를 함께한 참가자들은 우리나라 전통장을 통해 장의
역사와 음식문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천리장과
어육장 시식을 한 참가자들은 “다양한 전통 장맛을 경험할 수
있어서 알찬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딸기고추장 제조 시연을 할
때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라는 말에 오히려 내가 더
큰 행복을 느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맛과 전통 장맛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 당연한 것들이 잊히지 않고
지속적으로 후대에 이어질 수 있도록 ‘전통 장맛 알리는 일’을 더
넓게, 더 깊게, 더 많이 해나갈 것이다. 관람객들이 보여 준 전통
장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변하지 않는 가치가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전통 장을 만들고, 전통 장맛을
지키고, 전통 장맛을 알리겠다.
〈기다림의 맛, 시_간〉&
명인과의
대화
〈기다림의 맛, 시_간〉은 국립농업박물관에서 한국 ‘장醬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기원하며 마련했던 2024년 하반기 기획전이다. 기록과 문헌을 바탕으로 장에 대한 역사성과 전통성을 되짚어 보며 장문화에 담긴 기다림의 맛과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고 발효로 완성되는 정성스러운 우리 음식 문화를 되새겼다. 또한 연계 프로그램 ‘명인과의 대화’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전통장 제조 과정을 시연하고 직접 맛보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 장문화는 2024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