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5년 7월 8일 자 동아일보 호외
국가경영의 토대, 치수治水
한 세기 전 한반도에는 훗날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로
부르게 된 물난리가 발생했다. 홍수는
1925년
7월부터
9월까지
4회에 걸쳐 일어났는데, 이 중
7월
6일부터
15일간 내린 비로 한강을 비롯해
섬진강, 영산강, 낙동강, 만경강 등이 범람하여 우리 땅 대부분이
물에 잠겼다. 이전 규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던
수해였기에 역사는 지금까지 미증유의 대홍수로 기억하고 있다.
동아시아 역대 왕조에서 치수治水는 왕조 개창의
이념적 기반이었다. 중국인들이 최초의 왕조로 주장하는
하夏나라 우禹왕은 치수를 상징한다. 그는
『맹자』 「등문공滕文公」 상편에서 “8년간 전국을 돌며 물길을 정비했고, 이 과정에서 자기 집 앞을
3번이나 지나쳤지만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삼과가문이불입三過家門而不入의
당사자다. 치수의 성공으로 농업이 발전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우왕은 순舜 왕에게서 왕위를 선양禪讓받아
하나라를 개국할 수 있었다. 우왕의 아버지 곤鯤 역시
제방을 쌓는 방식으로 홍수를 막으려 했지만, 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반면 우왕은 하천 흐름을 따라 물길을 터주는
방식으로 치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 역사 속의 홍수 기록
삼국시대에는 수해가 있었을 때를 대수大水 큰물, 한물-큰비가 내려 개울이나 강에 넘쳐흐르는 물, 대우大雨 큰비-오래도록 많이 오는 비라고 했는데,
홍수에 대해 갖고 있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살필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 24건,
「고구려본기」 4건, 「백제본기」
5건 등 총
33건의 홍수 발생 사실을 기록했는데,
고구려 민중왕閔中王
2년45이 최초며 가장 큰
홍수는 신라 진평왕
11년589으로 “나라 서쪽에
홍수가 져서 민호 30,360호가 물에
잠기고 죽은 사람이 200여 명에
달한다”라고 했다.
자연재해에 대비했던 신라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경북
영천의 청제비菁堤碑가 있다. 자연석 앞뒷면에 청못 또는
청제菁堤로 부르던 제방의 축조와 수리 과정을
기록하였다. 축조 비문은 법흥왕
23년536 처음 큰 제방을
준공한 사실과 공사 규모, 동원 인력, 공사 책임자, 지방민을
통제하던 지방관地方官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수리
비문은 200여 년 뒤인 원성왕
14년798
4월 제방 수리 공사의 완료 사실과
함께 파손 내용, 수리 규모, 공사 기간과 책임자, 동원 인원 등의
내용을 기재했다. 이처럼 청제菁堤 축조·수리비는
신라사에서 홍수와 가뭄이 가장 빈번했던
6세기와
8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 자연재해 극복을 위해
국가에서 추진했던 토목공사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시사점이
크다.
고려시대에는 광종 연간인 961년을
시작으로 개경에 홍수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충정왕 때인
1350년에는 금강산 사찰까지
침수되었다고 한다. 『고려사』 「오행지」에는 예성강, 낙동강,
압록강 등 주요 하천에서의 범람 기록이 다수 기재되어 있는데,
산사태, 우물 솟구침 등도 함께 일어나 자연재해가 복합적으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역시 홍수와 같은 재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홍수보다 큰물[大水]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 현종1659~1674 때 홍수 관련 기록이
가장 많았고, 인조·숙종·효종 시기에도 빈번히 등장한다. 특히
1723년 『경종실록』에는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수천 명이 익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대홍수 화보(용산역사박물관)

경성부 수해 피해도[수재도]
홍수는 역대 왕조를 구분하지 않고 발생했는데, 대응 방식은 차이를
보여준다. 고려는 『고려사』 「오행지」에 홍수를 천재지변으로
규정하고 오행五行 원리로 이해하려고 했다.
제도적으로는 수리시설을 정비하고 제방과 하천 관리를 강화했다.
반면 조선은 수표水標와 측우기測雨器 등
강우 측정시설을 통해 홍수를 사전 예측하여 방비하려고 했으며,
내탕전內帑錢을 복구에 사용하는 등 치수에 대한 국왕의
책임과 의무가 한층 강조되었다. 태종·세종·숙종실록 등에는 수해에
책임을 지고 좌의정과 우의정 등이 스스로 면직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고, 『영조실록1741』과
『정조실록1792』에는 익사자들을 관官에서
거두어 묻어주고 단을 설치하여 제사 지내라고 했다. 이처럼
홍수에는 사후 복구 과정에서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한 국가의
정책적인 노력이 수반되었다.
국립기상과학원에서 작성한 1770년부터
2000년까지의 서울 지역 연평균 강우량
통계를 살펴보면 1,200㎜ 정도인데,
1770년대에는 평균보다 적은 강우를
기록하고 있다. 1880년부터
1910년까지는 근
30년 가까이 전체 평균의
50% 이하에 불과한 적은 강우량을
보이는 해도 있어 극심한 가뭄이 장기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20년과
1925년,
1934년과
1936년 등 총
4회에 걸쳐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홍수가 발생했다. 오랜 가뭄으로 홍수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점도
있지만, 1920~30년대 홍수는 압도적인
강우량과 태풍의 영향이 주된 원인이었다.
대한제국을 강제 병탄*한 일본은 홍수 문제 해결을 위해 조선총독부 내무국 토목과
치수계治水係가 전담토록 하여 토지조사와 하천측량 같은
수문조사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헐벗은 산림과 연이은 호우는
산사태를 발생시켜 피해를 가중시켰다.
이 시기 전국적으로 피해를 준 1920년
홍수는 7월
19일 경남 산청에
400㎜의 호우豪雨를
내렸고, 경성京城; 현 서울의 한강 일대는 수백 리
연안이 수해를 입었는데 특히 노량진과 영등포 그리고 뚝섬의 침수
사실을 알리는 조선일보의 보도 기사가 확인된다.
* 병탄: 영토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것

홍수로 끊긴 한강철교
사진 속에 남겨진 을축년 대홍수
지금부터 100년 전인
을축년1925에는 7월
6일부터
20일까지 보름 동안 내린 장맛비가
전국 평균 700~970㎜에 이르렀다.
1년 평균 강우량의
80%가 일시에 쏟아져 내린 것으로
엄청난 폭우였다. 서울에서만
6,792가구가 침수되고
29,229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경기도에서는 356명이 목숨을 잃었다.
서울에서 피해가 집중된 곳은 뚝섬과 이촌동이었다. 이촌동은 조선인
노동자 주거시설이 밀집한 곳이었는데, 홍수 이전부터 제방 문제로
주민과 경성부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
15일 밤부터
17일까지 내린 폭우로 서울 지역은
엄청난 수해를 당했다. 당시 모든 일간지는 미증유의 참사로
묘사했다. 한강 연안 대부분이 침수되어 조선총독부는 전시에 준하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이때논
32,000단보1단보=10a, 밭
67,000단보, 가옥
6,000여 호가 유실되었다. 그뿐 아니라
가옥 17,000여 호가 붕괴 또는 반파,
46,000여 호 침수, 사망자
647명, 재산 손실
1억
300만 원이라는 경험해 보지 못한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재산 손실은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약
60%1925년 총독부 세출 총액 1억 7천 176만 3천 원에
달했다.
국립농업박물관 소장품인
『대경성용산대홍수참상사진첩大京城龍山大洪水慘狀寫眞帖』은
100년 전 참상을 기록한 사진첩이다.
주목되는 것은 피해 복구가 본격화되기도 전인 같은 해
8월 10일
사진첩이 발행된 것이다. 현재 한강로 지역인 한강통漢江通
8번지에 있었던 이노우에 긴지井上欣治 상점에서
발매했는데, 편집자는 이노우에 이사오井上勇夫였다.
이노우에 긴지는 경성에서 활동하던 인쇄업자로 이노우에
쇼부도井上尙武堂라는 인쇄소를 운영하던 인물이다.
편집자와의 관계를 알 순 없지만 가족으로 추정된다. 판매가는
3원인데 현재 가치로
9~15만 원에 해당하는 고액이었다.
사진첩은 금박으로 제목이 인쇄된 표지와 함께
46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용산·마포·뚝섬 등지의 침수 상황과 구호 활동, 피난민 모습 등을
담고 있다.

수재민 구호 활동

대경성용산대홍수참상사진첩 표지
100년 전 홍수는 큰 피해를 주었지만,
예기치 못한 변화도 가져왔다. 복구 과정에서 총독부는 홍수 후 한강
본류와 안양천 등 지류에 제방을 건설했는데 이때 골재 채취를 위해
선유도를 폭파했다. 선유도[선유봉]는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단골
방문처였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외에도 한강 범람으로
토사 유출과 대규모 충적이 발생해 잠실 섬 남쪽 송파강을 본류로
했던 한강이 잠실 북쪽 신천강현 잠실 ‘새내역’ 북쪽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송파강 유량이 감소하면서 한강 상류 물자의
집결지였던 송파나루가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홍수 이후 송파나루 주변 주민을 석촌과 가락으로 이주시키고
허허벌판으로 바뀐 이촌동에 일본인 집단 거주시설이 들어서면서
전통적으로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나뉘어 있던 용산 지역
대부분이 일본인 거주지로 바뀌게 되었다.
홍수는 땅속 깊게 묻혀있던 역사의 일면을 햇빛 위로 드러내기도
했는데, 조선시대 왕실의 잠실蠶室이 있던 지역이
황폐해지면서 더 이상 양잠과 뽕나무 재배가 불가능해져 현재는
지명으로만 옛 흔적을 전하고 있다. 또한 뚝섬의 유래가 된
독신사纛神祠가 소실되었고, 암사동 선사유적지와 한성
백제의 왕성으로 추정되고 있는 풍납토성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낡은 사진첩이 전하는 이야기
국립농업박물관에 소장 중인 빛바랜 사진첩 한 권에는 이처럼 100년 전 이 땅을 할퀴고 간 수마의 생채기가 정지된 시간으로 남아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올여름에도 기록적인 호우로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이 발생했다. 기후와 생태계 변화가 늘어나면서 이번과 같은 자연재해는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한 권의 사진첩은 단지 100년 전 상처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100년 전 ‘재해에 대비하고 준비하라’는 끝내지 못한 숙제의 마무리를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