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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연학
(문화체육관광부 학예연구관)

풍구와 듸림부채
그리고 오늘날의 :
풍구

우리 선조들은 곡식에 섞인 쭉정이, 검부러기 등을 날려 보내기 위해 여러 도구를 사용하였다. 부뚜, 듸림부채, 풍구風具, 키, 넉가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 후기 <경직도> 타작마당에는 개상으로 벼 낟알을 털어내고 키와 넉가래를 이용해 바람으로 검부러기를 날려 보내는 모습을 손쉽게 볼 수 있다. 이런 광경은 1970~80년대까지도 지속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다. 현대화된 일체형 농기계의 등장으로 잡물을 날리는 전통 농기구는 현재 보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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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질과 키질(<경직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부뚜와 듸림부채

부뚜는 곡식의 잡물을 날리기 위하여 바람을 일으키는 데 쓰는 너비가 좁고 길이가 긴 자리이다. 지역에 따라 ‘부뚝· 풍석風席·북두’라고도 하는데, 조선 후기 실학자 서호수徐浩修, 1736~1799가 지은 『해동농서海東農書 1799』에는 ‘양석颺席’을 ‘붓돗’이라고 하면서 ‘길이가 일고여덟 자’라고 덧붙였다. 중국어 사전인 『역어유해譯語類解 1690』에서는 ‘양곡자揚穀子’를 ‘붓돗치다’로, 만주어를 한문과 한글로 풀이한 사전인 『한청문감漢淸文鑑 1779』에서는 ‘양장颺場’을 ‘붓돗질item07다’로 새겼다.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에서 발간한 『조선의 재래농구1925』에서는 ‘풍석風席’, ‘풍연風莚’으로 적었다.
부뚜질은 곡식에 섞여 있는 검부러기 따위의 잡물을 날려 보내는 행위이다. 한 사람이 자리 가운데를 밟고 손으로 쥐기에 편리하도록 ‘부뚜손’이라는 둥근 막대기를 잡는다. 이후 좌우로 벌렸다가 모으면서 바람을 일으키면 다른 사람이 키나 바구니에 담은 곡식을 위에서 조금씩 흘린다. 현존하는 부뚜의 크기는 너비 50㎝, 길이 250㎝ 정도이다. 부뚜는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우리나라 전통농기구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1799년(정조 23년)에 편찬한 『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 부뚜의 폐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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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경기대학교 소성박물관 소장)

“우리는 풍구가 없는 탓에 사람이 한 발로 긴 자리의 가운데를 밟고 손으로 양쪽 옆을 잡고 닭이 날개 치듯이 부치면, 다른 사람이 소쿠리에 담긴 곡식을 위에서 아래로 소석小席, 부뚜 옆으로 붓는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바람이 세게 나오고 쭉정이를 말끔하게 날려버릴 수 있겠는가? 또 부뚜로 하루 종일 부치고 나면 부뚜도 해질 뿐 아니라 팔의 힘도 다 빠진다. 또 왕골을 물에 담그고 노끈을 꼬아서 부뚜를 다시 짜야 하기 때문에 이삼일 품값을 허비하게 된다. 또 부뚜를 부리려면 팔의 힘도 세고 능숙해야 하는데 온 마을을 뒤져도 두세 사람만 쓸 수 있다. 그들에게 삯을 주며 술, 밥까지 주어야 하기에 그 비용은 배로 들어 농가의 폐단으로 여긴 지 오래되었다”고 적으면서 중국식 풍구를 도입해서 사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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듸림부채(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듸림부채의 ‘듸림’은 ‘무엇을 들이다’라는 뜻으로, 바람을 불러들이는 부채이다. 듸림부채는 너비 35.5cm, 길이 62.5cm(국립민속박물관 소장)에 이를 정도로 일반 부채에 비해 상당히 크다. 뼈대는 댓가지나 가는 통대로 얽고 앞뒤 양쪽에 한지를 여러 겹으로 발랐으며 한끝에 긴 자루를 붙였다.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부뚜부채’라고 부르기도 한다.
듸림부채는 키에 담은 곡식을 천천히 흘리거나 넉가래로 떠서 공중으로 흩뿌릴 때 이를 두 손으로 쥐고 위아래로 흔들어서 바람을 일으킨다. 자연풍에 인위적인 바람을 더 세게 가한 것이다. 『조선의 재래농구』에서는 두 사람이 하루에 30~40석 정도의 잡물을 날린다고 보았다.

풍구

풍구는 날개를 회전해 바람을 일으켜서 가벼운 쭉정이와 검부러기를 날려 보내고, 무거운 알곡은 아래로 떨어지는 구조이다. 풍구는 지역에 따라 풍고·풍로·풀무·품구·풍차風車로도 불린다. 옛 기록을 살펴보면, 『북학의北學議 1778』, 『과농소초』, 『해동농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19세기 초』에는 풍구를 ‘양선颺扇’이라 기록하였고, 『방언유석1778』, 『물보物譜 1802』, 『사류박해事類博解 1855』에는 ‘선차扇車’로, 『농정촬요農政撮要 1886』에는 ‘풍선차風扇車’로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풍구를 오랜 전통 농기구로 인식하지만, 연암 박지원의 『과농소초』에 근거하면, 조선 후기 풍구는 중국에서는 가가호호 사용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은 중국을 여행하면서 풍구 제작법에 대한 지식도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풍구는 ‘풍궤자風櫃子’라고 불렀으며, 굴대를 가운데 두고 얇은 판자나 대쪽을 붙여서 만든 부채 네 개 혹은 여섯 개를 부착하고 손잡이를 돌리거나 발판을 눌러 부채가 돌아가게 하였다. 풍구 위에는 함지를 달고 그 밑에 얇은 판자를 받쳐서 열었다 닫았다가 하면 밑으로 쏟아지는 쌀이 고르게 드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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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구(국립농업박물관 소장)

박지원은 1792~1796년 경남 함양의 안의현감安義縣監으로 재직 때 중국의 풍구를 모방해 제작하여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어린아이 한 사람이 풍구에 기대서서 발판을 약간 밟아도 하루에 100섬이나 되는 낟알을 하루에 다 부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농민이 편리한 풍구를 본체만체하였다. 이는 그들이 거친 곡식을 좋아하고 깨끗한 것은 싫어해서가 아니다. 지주가 거친 낟알의 수량만큼 깨끗한 낟알을 요구할 것이 두렵고, 국가로부터 거친 사환미社還米를 갖다 먹고 그만큼 깨끗한 것으로 갚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선진적 농기구라도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조건하에서 실용적으로 보급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은 17세기에 중국의 풍구를 받아들였고, 명칭도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당기唐箕’라고 명명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농가마다 풍구를 갖출 정도였고, 일본 <경직도>에도 등장한다.
국립농업박물관 소장 풍구는 1900년대 이후 일본에서 도입된 개량 농구이다. 1909년 통감부에서 배부한 개량 농구 중에서 풍구가 확인되며, 1916년과 1917년에는 풍구가 각각 15,315대와 11,143대 보급되었다는 기록 등을 통하여 볼 때 1900년대에 도입된 이후 1910년대에 본격적으로 농가에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발간한 『조선의 재래농구』에 따르면, 당시 일제 ‘당기唐箕’의 가격은 한 대에 30원 내외였다. 이때 풍구는 송풍장치, 곡물 투입부注入口, 투입량 조절장치, 곡물배출구 2칸, 검불 배출구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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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풍구(朝鮮ノ在來農具,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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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력 풍구(국립농업박물관 소장)

동력 철제 풍구

풍구를 수동으로 돌리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근년에는 전동기를 달아 돌리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는 바람개비를 보다 능률적으로 개량하여 크기를 작게 만든 철제 풍구가 농가에 보급되었다. 주로 보리, 콩, 들깨 등 다양한 곡물 선별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벼의 경우 도정 시에 잡물 제거 등의 과정을 거쳐서 쌀이 깨끗이 나와 풍구를 사용하는 일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