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박물관 소식 NAMUK MAGAZINE 2023 + NO. 4 농업박물관 소식 NAMUK MAGAZINE 2023 + NO.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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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온 편지

‘과거에서 온 편지’는 농업에 관한 옛글을 소개해 현대인에게 농업의 중요성과 삶의 교훈을 남기며,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가치를 전달합니다.

「다산사경첩」에서 배우는 삶의 운치와 지혜

글. 정성희(前실학박물관장)
사진

다조1
반반하게 청석을 갈아 붉은 글자 새기니
차 달이는 작은 부뚜막이 초당 앞에 놓였네
반쯤 다문 물고기 입이 불길 깊이 감싸고
짐승 귀 굴뚝에 가는 연기 피어나네
솔방울 주어다 숯 새로 갈고
매화꽃잎 걷어내고 샘물 떠다 더 붓네
차 많이 마셔 정기에 침해됨을 끝내 경계하여
앞으로는 단로를 만들어 신선 되는 길 배워야겠네
약천2
옥 같은 우물에 진흙은 없고 다만 모래만 깔렸으니
한 바가지 떠 마시면 신선의 술인 듯 상쾌하다오
처음엔 돌 틈에 승장혈을 찾았는데
도리어 산중에서 약 달이는 집이 되었네
길을 덮은 여린 버들 비스듬히 물에 떠 있고
이마에 닿은 작은 복숭아 거꾸로 꽃을 달고 있네
담을 삭이고 묵은 병 낫게 하는 약효는 기록할 만하니
나머지 또 길어다 벽간차 끓이기에 좋다오
정석3
죽각(초당) 서편 바위가 병풍 같으니
부용성 꽃 주인은 벌써 정씨에게 돌아왔네
학이 날아와 그림자 지듯 이끼 무늬 푸르고
기러기 발톱 흔적처럼 글자는 이끼 속에 또렷하다
미로처럼 바위를 경배하니 외물을 천시한 증거요
도잠처럼 바위에 취했으니 제 몸 잊은 것을 알리라
부암과 우혈도 흔적조차 없어졌는데
무엇하러 구구하게 또 명을 새기리오
연지석가산4
갯가의 괴석 모아 봉우리를 만드니
진짜 산보다 만든 산이 더 낫네
가파른 돌 교묘하게 삼층탑을 앉히니
움푹한 곳 모양따라 한 가지 소나무를 심었네
서리고 휘감긴 묘한 자태 지봉석을 웅크리게 앉힌 듯
뾰족한 곳 얼룩무늬 죽순이 솟구친 양
고요히 물밑 바라보니 푸른빛이 겹겹일세
1 茶竈
靑石磨平赤子鐫
烹茶小竈艸堂前
魚喉半翕深包火
獸耳雙穿細出煙
松子拾來新替炭
梅花拂去晩調泉
侵精瘠氣終須戒
且作丹爐學做仙
2 藥泉
玉井無泥只刮沙
一瓢㪺取爽餐霞
初尋石裏承漿穴
遂作山中煉藥家
弱柳蔭蹊斜汎葉
小桃當頂倒開花
消痰破癖功堪錄
作事前宜碧磵茶
3 丁石
竹閣西頭石作屏
蓉城花主已歸丁
鶴飛影落苔紋綠
鴻爪㾗深字跡靑
米老拜時徵傲物
陶潛醉處憶忘形
傅巖禹穴都蕪沒
何用區區又勒銘
4 蓮池石假山
沙灣怪石聚爲峰
眞面還輸飾假容
嶻嶭巧安三級墖
谽谺因挿一枝松
蟠廻譎態蹲芝鳳
尖處斑文聳籜龍
復引山泉環作沼
靜看水底翠重重

정약용은 강진 18년 유배 생활 중 11년간을 다산초당에서 보냈다. 강진 도암면 귤동 마을의 만덕산 중턱에 자리 잡아 강진만을 한눈에 굽어보는 이 초당은 원래 귤림처사 윤단尹慱이 세운 산간 정자였다. 윤단은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공재 윤두서의 손자로 정약용에게 학문을 닦는 공간으로 이곳을 내주었다. 정약용은 그 아들 윤규로尹奎魯의 도움을 받아 1809년에 다산초당을 고쳐 공부와 저술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었다.

초당을 새로이 고친 정약용은 이를 기념하여 초당을 대표하는 절경을 꼽고 이를 각각 한 편의 시로 노래했는데 그 친필 시첩이 바로 국립농업박물관 소장의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이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당시 다산초당에 조영한 네 가지 경물 즉, 다조茶竈, 약천藥泉, 정석丁石,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을 초당을 대표하는 4경으로 꼽았다.

먼저 제1경인 다조는 차 달이는 부뚜막이다. 정약용은 다조의 위치가 다산초당 앞에 있다고 했다. 다조에 불을 붙이면 마치 물고기가 입안 그득히 불을 뻐금대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은 짐승의 귀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오늘날 다산초당 앞마당에 있는 넓적한 바위 위에서 차를 끓인 게 아닐까 한다.

4경 중 두 번째는 약천이라는 이름의 샘물이다. 약천은 원래 그저 웅덩이였으나 정약용이 파자 맑은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약천은 오늘날 다산초당 좌측 뒤편 모서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정약용은 약천에서 나는 물로 달인 차를 마시면 가래를 삭혀주고 고질병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시에서 말했다. 약천의 용도가 차를 달이는 찻물임을 알 수 있다.

제3경은 정석이 새겨져 있는 석병石屛이다. 석병은 바위 병풍이란 의미다. 이 바위에 정약용은 다산초당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의미로 ‘정석丁石’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그는 왜 이름은 빼고 성씨만 적었을까? 이름이란 것은 원래 사라지는 것이니 구차하게 이름을 새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상 명예는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제4경은 석가산이다. 1809년에 정약용이 초당 주인인 윤규로와 함께 강진만 바닷가에서 기괴한 바위를 보고 그것을 주어다가 만든 것이 석가산이다.

약천에서 물을 길어약천/ 달인 차를 마시며다조/ 바위엔 글씨가 있고정석/ 석가산은 마치 그림 같다.연지석가산

다산초당은 시와 글씨, 그리고 자연이 있는 선비의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게다가 초당 동쪽으로 동백꽃이 피어 있는 산길을 넘어가면 혜장선사가 있는 백련사가 나온다. 세상에 이보다 더 운치있는 곳이 있을까 싶다.

정약용은 초당 주위에 무성한 차나무의 찻잎을 따서 끓여 마시며 세상의 시름을 잊고 저술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해남 윤씨의 이름 없는 산속 정자는 '다산초당'이라는 담백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