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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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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차하람
(한국농수산대학교 학생, 국립농업박물관 서포터즈 농BRO 3기)

스펙 대신 흙을 선택한 어느 청년농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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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터 타는
기획자,
농업에
문화를 입히다

꿈이 사라진 시대,
옥상 스티로폼 박스에서 찾은 ‘확실한 행복’

주변을 둘러보면, ‘꿈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기가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렵다. 사회는 인생의 성패가 스무 살, 대학 입시 한 번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가르친다. 좋은 대학에 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직해서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것. 그것이 유일한 정답이자 목표가 되어버린 탓에 정작 80년, 100년을 살아갈 내 인생의 진짜 ‘가슴 뛰는 꿈’은 사치품 취급을 받곤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공기가 탁한 독서실에서 문제집과 씨름하지 않고, 흙냄새를 맡으며 일찌감치 내 인생을 걸어볼 만한 가슴 뛰는 무대를 발견했으니까.
그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초등학교 5 학년 때, 우연히 집 옥상에 굴러다니던 하얀 스티로폼 박스에 감자를 심게 됐다. 농사에 대한 거창한 지식도 없었다. 그저 흙손질 한 번 해본 적 없는 손으로 흙을 덮고,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전 물을 주며 싹이 트기를 기다렸다. 옥상에 올라가 초록색 잎사귀가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확의 날, 흙을 뒤집었을 때 주렁주렁 딸려 나오던 그 알 굵은 감자들을 보며 느꼈던 전율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흙 묻은 감자의 거친 질감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그것은 단순히 맛있는 간식을 얻은 기쁨이 아니었다.
‘내가 흘린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확실한 진리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공부는 아무리 노력해도 등수가 떨어질 수 있고 인간 관계는 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가 많지만, 흙은 정직했다. 심은 대로 거두고 돌본 만큼 보답한다는 그 명확한 인과관계가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 길로 나는 망설임 없이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한국농수산대학교 원예학과에 입학하며 ‘청년 농부’라는 타이틀을 내 인생의 명찰로 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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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평의 정글과 나를 위한 맞춤 정원,
그 사이에서 길을 묻다

하지만 패기 넘치던 청년 농부의 꿈도 차가운 현실의 벽 앞에서는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김태리처럼 낭만적인 귀농을 꿈꿨던 나에게, 현장은 픽션이 아닌 다큐멘터리, 아니 전쟁터였다.
작년 3월, 3만 평 규모의 대형 토마토 농장에서 실무를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은 내가 상상하던 아기자기한 텃밭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유리 온실, 최첨단 제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그곳은 거대한 토마토 공장이자 정글이었다.
나는 그 빽빽한 토마토 줄기들 사이에서 매일 전쟁을 치렀다.
하루 종일 잎을 따고, 수확하고, 운반해도 작업은 끝이 나지 않았다. 땀범벅이 된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아, 규모가 크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구나. 준비 없이 덤벼들었다가는 이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할 수도 있겠구나.’ 대규모 생산 시스템의 위대함을 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라는 사람의 개성이 지워지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 고민을 안고 다른 농장을 찾아갔다. 이곳은 토마토 농장과는 정반대였다. 규모는 작지만, 농장주는 본인의 몸에 딱 맞는 기계들을 직접 용접하고 조립해서 쓰고 계셨다. 이름하여 ‘자존적 스마트팜’. 기성품 기계에 사람을 억지로 맞추는 게 아니라, 내 작업 방식과 신체 조건에 기계를 맞추는 방식이었다.
충격이었다. 호미 대신 용접 마스크를 쓴 농부의 모습에서 나는 미래를 보았다. 농업도 내 스타일에 맞춰 설계하고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로 기획하고 시스템을 장악하는 것.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임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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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터 타는 기획자,
‘캐릭터’로 농업에 문화를 입히다

농사는 기술을 배우면 누구나 지을 수 있다. 하지만 남들과 똑같은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파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이 냉정한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무기는 바로 ‘문화’와 ‘캐릭터’이다.
농산물은 먹으면 사라지지만, 캐릭터는 팬덤으로 남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끄적여온 흙의 요정 ‘흐기Heugi’라는 캐릭터가 있다. 흐기는 머리에 심는 식물에 따라 성격이 변하는 흙 요정이다. 아이들이 흐기가 등장하는 게임을 하며 농작물을 키우는 재미를 느끼고, 마트에서 내가 키운 작물을 볼 때 빨간 열매가 아닌 ‘토마토 흐기’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
앞으로 미디어에 비친 청년 농부를 볼 때 젊은 나이에 힘든 일 하느라 고생한다는 동정 어린 시선보다는, ‘저 친구는 농업으로 어떤 재미있는 사업을 벌일까?’라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봐주셨으면 한다. 내가 정의하는 2026년의 청년 농부는 종합 예술가이자 기획자이다. 우리는 호미 대신 태블릿 PC를 들고, 트랙터를 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유튜브 콘텐츠를 기획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골에 남은 사람들이 아니라, 농촌을 가장 힙Hip하고 매력적인 공간으로 바꿀 주체적인 세대니까.
나는 오늘도 내일의 농장을 위해 장화를 신는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아 나만의 콘텐츠를 파종한다. 남들과는 다른 태블릿 화면 위에서, 농작물과 캐릭터 ‘흐기’가 함께 뛰어놀 가장 매력적인 무대를 기획하는 것이다. 흙냄새나는 농촌을 가장 트렌디한 이야기로 채워갈 나의 내일에 많은 기대와 응원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