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
눈알을 굴려 하늘을 쳐다보니,
참 높구나, 가을 하늘은
멀리서 둥그런 해가 네 까만 얼굴에 번쩍인다.
네가 손등을 대어 부신 눈을 문지를 새,
어느 틈에 재빠른 참새놈들이
푸르르 깃을 치면서 먹을 콩이나 난 듯,
함박 논 위로 내려앉는다.
휘이! 손뼉을 치고 네가 줄을 흔들면,
벙거지를 쓴 꺼먼 허수아비 착하기도 하지,
언제 눈치를 챘는지, 으쓱 어깻짓을 하며 손을 젓는다.
우! 우! 건넛말 네 동무들이 풋콩을 구워놓고,
산모퉁이 모닥불 연기 속에 두 손을 벌려 너를 부르는구나!
얼싸안고 나는 네 볼에 입맞추고 싶다.
한 손을 젓고 말없이 웃어 대답하는
오오, 착한 네 얼굴.
들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어찌 마음이 없겠니?
덥고 긴 여름 동안 여위어온 네 두 볼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철둑에 선 나뭇잎들마저 흐드러져 웃는구나!
지금 네 눈앞에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오지게 찬 벼이삭이 누렇게 여물어가듯,
푸르고 넓은 하늘 아래 자유롭게 너희들은 자라겠지……
자라거라! 자라거라, 초목보다도 더 길길이.
오오! 그렇지만 내 목이 메인다.
바람이 불어온다.
수수밭 콩밭을 지나 네 논 두둑 위에로,
참새를 미워하는 네 마음아,
한 톨의 벼 알을 뉘 때문에 아끼는고?
임화
『현해탄』(1938)
나는 해를 먹다
구름은 차렵옷에 놓기 알맞아 보이고
하늘은 바다같이 깊다랗다 하다.
한낮 또약볕이 쬐는지도 모르고
온 몸이 아니 넋조차 깨운― 아찔하여지도록
뼈저리는 좋은 맛에 자지러지기는
보기 좋게 잘도 자란 과수원果樹園의 모꼬지다.
배추 속처럼 핏기 없는 얼굴에도
푸른 빛이 비치어 생기를 띠고
더구나 가슴에는 깨끗한 가을 입김을 안은 채
능금을 바수노라 해를 지우나니.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발을 뻗기도 하면서
무성한 나뭇잎 속에 숨어 수줍어하는
탐스럽게도 잘도 익은 과일을 찾아
위태로운 이 짓에 가슴을 조이는 이때의 마음 저 하늘같이 맑기도
하다.
머리카락 같은 실바람이 아무리 나부껴도
메밀 꽃밭에 춤추던 벌들이 아무리 울어도
지난 날 예쁜이를 그리어 살며시 눈물지는,
그런 생각은 꿈 밖에 꿈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남의 과일밭에 몰래 들어가
험상스런 얼굴과 억센 주먹을 두려워하면서.
하나 둘 몰래 훔치던 어릴 적 철없던 마음이 다시 살아나자
그립고 우습고 죄 없던 그 기쁨이 오늘에도 있다.
부드럽게 쌓여 있는 이랑의 흙은
솥뚜껑을 열고 밥김을 맡는 듯 구수도 하고
나무에 달린 과일― 푸른 그릇에 담긴 깍두기 같이
입안에 맑은 침을 자아내나니.
첫 가을! 금호강琴湖江 굽이쳐 흐르고
벼 이삭 배부르게 늘어져 섰는
이 벌판 한가운데 주저앉아서
두 볼이 비좁게 해같은 능금을 나는 먹는다.
김춘수
『꽃의 소묘』 (백자사, 1959)